퇴근길에 그냥 지나쳤던 간판을, 어느 날은 괜히 다시 보게 된다
늘 다니던 길인데도, 그날은 좀 달라 보이는 날이 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길, 머릿속은 온통 오늘 있었던 일로 복잡한데 골목 한쪽에서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게 눈에 걸렸어요.
여러 번 지나쳤을지도 모르는 작은 간판. “아시아 & 웨스턴 퓨전” 뭐 그런 글자가 적혀 있었던 것 같은데 솔직히 처음엔 별 감흥이 없었어요. 그냥 또 하나 생긴 가게겠지, 정도.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발걸음이 멈추더라고요. 몸은 피곤한데, 마음은 뜬금없이 “오늘은 집에서 라면 말고, 조금 다른 거 먹어볼까?” 이런 생각이 스르륵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별 준비도 없이, 그냥 그런 기분 하나만 들고 문을 살짝 밀고 들어가 보게 되었죠.
문을 여는 순간, 동네와는 조금 다른 공기가 흐르는 곳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느껴진 건 “여기 뭔가 애매하게 좋네” 하는 그 감각이었어요.
형광등처럼 새하얗게 밝지도 않고, 너무 어두워서 괜히 눈치 보이지도 않는 조도. 동양적인 느낌이 살짝 나는 장식들 사이에 서양식 테이블 세팅이 섞여 있어서 어느 나라에 있는 건지 잠깐 헷갈릴 정도였습니다.
구석 자리에는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이 있었고, 창가 쪽에는 데이트 초반 같아 보이는 커플, 안쪽에는 가족이 자리를 잡고 있었어요. 각자 다른 분위기였지만 이상하게 어색함 없이 한 공간 안에 잘 섞여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수원의 어딘가에 있는 작은 레스토랑인데 안에 들어와 앉으니 조금은 다른 도시로 이동한 듯한 이런 느낌. 이런 곳, 실제로 많지 않잖아요.
메뉴판을 펼치는 순간, 머릿속 지도가 잠깐 흔들린다
메뉴판을 열어보면 익숙한 단어들 사이에 낯선 조합이 슬쩍 숨어 있습니다.
“소이 소스를 곁들인 누들”, “동남아풍 허브와 서양식 그릴”, “라이스 위에 올라간 서양식 메인” 같은 표현들. 대충 온도는 알겠는데 입에 넣었을 때 어떤 맛일지 바로 그려지지 않는 이름들.
요즘 외식 트렌드를 보면, 이런 브릿지 역할을 하는 퓨전 메뉴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고 하죠. 2025년 외식 키워드를 다룬 글만 봐도 K-푸드와 다문화적 요소가 섞인 ‘그라데이션 K’ 같은 표현들이 등장하더라고요. 2025 외식 트렌드 소개 글을 보면 익숙한 한식에 새로운 문화를 입히는 흐름이 이미 꽤 자연스러운 시대가 됐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contentReference[oaicite:0]{index=0}
이곳 메뉴들도 딱 그 경계에 서 있습니다. 무조건 낯설게 밀어붙이는 것도 아니고, 안전하게 익숙함만 파는 것도 아니고요. 입 안에서 “이건 아는 맛인데?” 했다가 두세 번 씹을수록 “어, 이건 또 뭐지?” 하게 되는 그 지점.
한 접시 안에서, 동양과 서양이 눈치 보듯 마주 앉아 있다
실제로 주문한 접시가 테이블에 내려오면 첫 인상은 꽤 정돈되어 있습니다.
색감도 조심스럽게 맞춰져 있고, 소스가 흘러내리지 않게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있고, 그렇다고 너무 ‘인스타 사진용’처럼 꾸민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첫 한 숟가락, 첫 한 젓가락을 먹어보면 그 순간부터 정돈되었던 인상이 살짝 무너지는 느낌이 들어요. 좋은 의미로요.
동남아풍 허브 향이 먼저 치고 올라왔다가 익숙한 간장 베이스가 뒤에서 잡아주는 느낌. 서양식 크리미 소스 같은 질감이 지나가다가 마지막에는 살짝 매콤한 여운이 남는 식.
머릿속에 있던 ‘나라별 음식 지도’가 잠깐 흔들리면서 재배열되는 것 같달까요.
이 집이 2020년에 문을 열었다는 얘기를 듣고 나서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이곳은 2020년에 문을 열었다고 합니다.
그 해가 어떤 해였는지 다들 기억하시잖아요. 사람들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거리가 조용해졌던 시기.
그런 때에, 수원 중심부에 이렇게 새로운 메뉴 구성을 내건 집을 연다는 건 솔직히 말하면 조금 무모해 보이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때 “그래도, 이런 걸 시작해 보고 싶다”라고 마음먹었다는 거죠.
아시아와 서양을 섞어 새로운 접시를 만들겠다는 생각. 동네 손님들에게 낯설지만 편안한 경험을 주겠다는 의지.
2020년에 오픈하고, 2021년에는 손님 의견을 반영해 메뉴를 다듬었다고 합니다. “이건 너무 세다.” “이 조합은 좋은데 조금 더 깊었으면.” 이런 말들이 실제로 레시피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2022년에는 첫 연말 파티를 열었고, 2023년에는 서비스 교육을 본격적으로 진행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습니다.
그냥 연혁으로 정리하면 몇 줄이면 끝나는 이야기지만, 그 사이엔 불 앞에서 망설이는 셰프들, 홀에서 손님 반응을 유심히 보던 직원들, “우리 이거 한번 바꿔볼까?” 하고 늦은 밤까지 회의를 했을 수도 있는 사람 냄새 나는 장면들이 수없이 숨어 있겠죠.
숫자는 네 줄인데, 그 안에 쌓인 날들은 셀 수가 없다
2020 — 문을 열다. 2021 — 메뉴를 고쳐 나가다. 2022 — 사람들을 초대해 연말을 함께 보내다. 2023 — 접客의 온도를 다듬다.
이렇게 네 줄로 끝나는 연혁이지만 실은 이 네 줄 사이가 이 공간의 진짜 역사겠죠.
그래서인지 이곳에 앉아 있으면 괜히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 이 집은 대충 만든 데가 아니구나.”
수원이라는 도시와 이 공간이 어울리는 방식
수원은 생각보다 복잡한 도시입니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나란히 붙어 있는 동네.
화성, 전통시장, 통닭 골목 같은 이미지가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새로 생긴 카페, 다이닝, 퓨전 바가 계속 업데이트되는 곳이기도 하죠.
최근 몇 년간은 아예 한국 음식이 전 세계 트렌드를 이끈다는 기사도 많아졌습니다. 푸드 비즈니스 코리아에서 정리한 2025 맛 트렌드 글을 보면 익숙한 음식에 이국적인 맛을 더한 ‘퓨전 컴포트 푸드’가 앞으로도 계속 중요한 키워드가 될 거라는 분석이 나오더군요. :contentReference[oaicite:1]{index=1}
이 집의 메뉴들도 그 흐름 안에 있으면서도 지역성, 동네 공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느낌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세계적이다”를 강조하기보다 “수원 사람 입에도 맞아야 한다”는 기준을 더 중요하게 두는 듯한 맛.
로컬과 퓨전이 부딪히지 않고, 자연스럽게 섞이는 자리
접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건 어디까지가 ‘외국 느낌’이고, 어디서부터가 ‘한국적인 편안함’이지?
그런데 한참 먹다 보면 굳이 그 경계를 나누지 않게 됩니다. 그저 “잘 어울린다”는 감정만 남고요.
한식 기반에 새로운 조합을 더하는 흐름은 이미 한국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죠. 한식과 퓨전 한식을 다룬 기사를 보면 김치 리소토, 봉골레 칼국수, 김치 기반 소스 등 여러 시도가 요즘 얼마나 자연스러운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contentReference[oaicite:2]{index=2}
이 공간의 접시들도 그런 흐름의 한 가운데에 있습니다.
주방에서 홀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리듬
이 집에서 흘러나오는 리듬은 음악 소리만이 아닙니다.
주방에서 나는 칼질 소리, 불이 켜졌다 꺼지는 소리, 접시가 살짝 부딪히는 소리, 그리고 직원 발걸음.
바쁜 시간대에는 그 리듬이 빨라졌다가 늦은 시간에는 조금 느려집니다.
그 가운데에 앉아 있으면 내 하루의 호흡도 조금씩 그 속도에 맞춰지는 느낌이 들어요.
서비스가 과하게 다가오지 않으면서도 분명히 느껴집니다. 물이 비었을 때, 접시가 비워졌을 때, 잠깐 고민하며 메뉴판을 넘기고 있을 때.
2023년에 서비스 교육을 강화했다는 얘기가 그냥 ‘마케팅용 문장’은 아니구나 싶었습니다.
편하게 있고 싶은 사람과, 특별한 날을 보내고 싶은 사람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곳
어떤 날은 후줄근한 차림으로 와서 그냥 밥 먹고 가도 괜찮고,
어떤 날은 조금 꾸미고 와서 기념일처럼 저녁을 보내도 잘 어울립니다.
같은 공간이 이렇게 여러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건 결국 베이스가 탄탄하다는 뜻이겠죠.
음식, 공간, 서비스. 셋 중 하나라도 크게 어긋나면 이런 균형이 나오기 어렵거든요.
손님과 함께 완성되는 메뉴들
이곳 메뉴들을 천천히 보다 보면 이상하게 ‘완성형’이라기보다 ‘살아 있는 중’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손님 반응에 따라 조금씩 수정되고, 어떤 건 시즌에 따라 사라졌다가, 어떤 건 단골들의 요청으로 다시 돌아오고.
실제로 외식업계에서도 이런 식의 유연성이 중요하다고 하죠. 트렌드를 적극적으로 메뉴 개발에 반영하는 흐름에 대해 외식산업 트렌드 칼럼을 보면 메뉴 및 상품 개발에서 트렌드를 적극 활용하는 비율이 매년 높아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contentReference[oaicite:3]{index=3}
이 집도 손님들의 반응을 꽤 세심하게 지켜보는 것 같았어요.
“이거 되게 특이하네요”라는 말이 불편한 뉘앙스인지, 진짜 칭찬인지.
“맛있는데, 조금 낯설어요”라는 말이 한 번으로 끝날 감상인지, 다음에 또 주문하게 될 여운인지.
그런 미묘한 표정과 톤을 주방과 홀 모두가 같이 읽어내고 결국에는 메뉴판 어디엔가 작은 수정으로 반영되는 것 같았습니다.
한 끼가 마음의 속도를 조금 늦춰주는 경험
이곳에서 한 끼를 먹고 나면 배가 찼다는 느낌 말고 다른 감각이 하나 더 남습니다.
“오늘 하루, 그래도 괜찮았다.” 라고 스스로에게 말해줄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소소한 여유.
요즘 푸드 트렌드 기사들을 보면 사람들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걸 넘어서 ‘경험’을 사러 간다고 하잖아요. :contentReference[oaicite:4]{index=4}
누군가와 나눈 대화, 테이블 위 조명, 접시에서 올라오던 향, 식사 후 골목을 나서며 마셨던 차가운 공기까지.
모두 합쳐져서 한 끼의 기억을 만듭니다.
이 집은 그 기억의 밀도가 생각보다 꽤 높은 편입니다.
언젠가 수원을 떠올릴 때, 이 집 불빛도 함께 떠올랐으면
나중에 시간이 지난 뒤 “수원에 살던 시절 어땠지?” 하고 떠올리면 화성도 생각나고, 통닭도 떠올라겠죠.
그 사이 어딘가에 이 작은 레스토랑에서의 저녁 한 끼가 살짝 끼어 있으면 좋겠습니다.
특별한 날이 아니어도 괜찮고, 화려한 기념일이 아니어도 괜찮아요.
그저 조금 지친 하루 끝에 골목 불빛이 눈에 들어와서, 가볍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가, 생각보다 따뜻한 시간을 보내고 나온 어느 밤.
그런 밤이 한 번쯤은 누구의 기억 속에 남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기억 한 조각이 또다시 누군가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이끌어 주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