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빛이 스며드는 시간, 문 하나를 열고 들어가면
요즘은 이상하게 저녁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요. 퇴근길엔 늘 같은 건물, 같은 전봇대, 같은 사람들.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눈이 멈추더라고요. 골목 끝에 낯선 불빛 하나. 이미 여러 번 지나쳤을지도 모르는데 왜 그날만 보였는지 스스로도 설명이 안 되는 그런 순간 있잖아요.
조심스레 다가가 문을 열었습니다. 딱히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 밖의 공기보다 안쪽 공기가 조금 더 따뜻해 보였다는 것뿐.
문턱을 넘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익숙함과 낯섦이 동시에 섞인 어떤 풍경이었습니다. 동양적인 선이 곳곳에 숨어 있는데 식탁 위의 구성은 또 서양 느낌이라 머릿속에서는 계속 질문이 뒤섞였어요.
“여긴 어떤 이야기로 만들어졌을까.” “이 메뉴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이런 궁금증, 오랜만이었죠. 요즘 음식점들은 빠르고 화려한 홍보가 많아서 들어가기 전에 이미 맛이 예상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공간은 조금 달랐습니다. 뭐라 정확히 짚을 순 없지만 숨겨진 이야기가 많겠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한 접시 위에서 서로 다른 나라가 살짝 부딪히는 장면
어느 나라 음식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메뉴들. 그렇다고 멋대로 섞여 있는 느낌도 아니고요. 아시아의 향, 서양의 온도, 한국식의 속도. 이 셋이 한 접시 안에서 아주 조용하게 서로 눈치를 보는 듯했습니다.
젓가락을 들까, 포크를 들까 잠깐 고민하게 만드는 그 순간마저 재밌었고요.
한 입을 천천히 씹다 보면 내 피부에 스치던 공기까지 달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이건 단순히 맛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가 이걸 만들기 위해 재료를 만지고 불 앞에서 고민했던 시간이 함께 씹히기 때문일지도 모르죠.
요즘은 퓨전 음식이 전 세계적으로 다시 주목받는 시대라던데 관련 글을 보면 금방 느껴질 겁니다. 퓨전 요리 트렌드 기사 같은 것들요. 그런데 여기 음식은 그런 ‘트렌드 따라하기’가 아니라 조금 더 섬세하고, 조금 더 조용하고, 무엇보다 바로 코앞에서 만들어진 온도가 느껴져요.
첫 숟가락을 들었을 때, 이상한 정적이 흘렀다
아주 미묘한 순간이었습니다. 첫 숟가락을 입에 넣었는데 갑자기 주변의 소리가 조금 멀어졌어요.
음식이 너무 좋아서라기보다 오랜만에 ‘처음 느낌’이라는 걸 느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어릴 때 처음 먹어본 무언가처럼 설명 안 되는 그 낯선 감정.
내 안에 작은 스위치가 켜지는 느낌이랄까… 나도 모르게 깊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뱉게 만드는 한 입.
이런 음식은 많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아요.
2020년, 세상이 어수선하던 해에 문을 열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상하게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2020년. 거리엔 사람들의 발걸음이 줄고, 표정들은 모두 지쳐 보였던 그 시기.
누군가는 가게 문을 닫았고 누군가는 버티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누군가는 미래를 포기할까 고민하던 그 해.
그런 혼란 속에서 “그래도 열어보자” 라는 결심을 했다는 건 누군가의 용기였을 겁니다.
이곳의 첫 해는 분명 쉽지 않았겠죠. 사람들의 발걸음이 들쭉날쭉했고 메뉴는 계속 바뀌었을 것이고 주방에서는 수없이 많은 시도가 있었겠죠.
그렇게 버티고 지나서 2021년에는 손님 의견을 적극 반영했다네요. “조금 더 깊은 맛이면 좋겠다.” “이건 맵기가 조금 아쉽다.” “이 조합은 꽤 잘 어울리는데?” 이런 말들이 레시피에 정말 영향을 줬다고 합니다.
2022년에는 연말 파티를 열었답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공간을 채우고 서로 다른 시간 속을 살던 사람들이 그 날만큼은 같은 테이블 위 음식으로 연결되는 순간.
2023년에는 서비스 방향을 정비했다고 하고요. 과한 친절이 아니라 정확한 타이밍의 배려. 이게 정말 어려운 것 아시죠?
연혁은 네 줄이지만, 그 사이엔 수많은 온도가 숨겨져 있다
2020 — 시작 2021 — 변화 2022 — 연결 2023 — 다듬기
글로 쓰면 네 줄인데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생각과 일이 있었을까요. 불 앞에서 셰프가 몇 번을 망설였을지,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이 어떤 감정을 숨기며 버텼을지.
그런 이야기를 모른다 해도 공간에 앉아 있으면 묘하게 느껴지는 게 있습니다. “이 집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았다.”
수원의 한복판, 여러 시간이 동시에 머무는 공간
여기 앉아 있으면 참 다양한 사람들을 보게 돼요.
데이트 중인 커플. 부모님과 함께 온 가족. 혼자 와서 조용히 숟가락을 드는 사람. 친구와 와서 사진을 찍는 사람.
같은 공간 안에서 모두 다른 속도로 시간을 보내고 있고 그게 아주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아마 음식과 공간이 그 다양한 온도를 그대로 받아주기 때문일 거예요.
조용한 순간을 원하는 사람에게는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사람에게는 여유를 준다
이런 공간은 많지 않습니다. 대체로 어딘가는 너무 시끄럽고 어디는 너무 형식적이고, 어디는 또 불편하죠.
그런데 이곳은… 설명이 어렵지만 “여기라면 잠깐 마음 내려놓아도 되겠다” 싶은 그런 느낌.
수원 같은 큰 도시에 이런 공간 하나 있다는 건 꽤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접시가 주는 용기 같은 것
기분이 안 좋은 날에도 마음이 너무 복잡한 날에도 누군가에게 턱하니 상처받은 날에도 따뜻한 음식 한 접시는 종종 말보다 위로가 되곤 하잖아요.
여기 음식이 딱 그렇습니다. 과한 감정 대신 조용한 힘을 주는 맛. 천천히 나를 다시 붙잡아주는 온도.
한 숟가락 안에 ‘견디는 힘’ 같은 것이 들어 있는 듯해요.
이런 건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재료를 다루는 기술만으로는 부족하고 공간을 꾸미는 감각만으로도 부족하고 손님을 이해하는 마음만으로도 부족하죠.
그 셋이 다 있어야 이런 음식이 나옵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삶이 바쁘죠. 하루가 너무 길고 너무 짧고 마음은 항상 어딘가 늦게 도착하고. 그런 날들 속에서 따뜻한 한 끼가 생각보다 큰 숨구멍이 되어줍니다.
그 숨구멍 같은 공간이 바로 이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원의 한복판에서 살짝 흔들리던 당신의 하루를 천천히 다시 세워주는 자리.
언젠가 문을 열고 들어와 자신만의 한 접시를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